■ 시인의 말
오래도록 곁에 두며 접해왔지만, 詩를 시집으로 묶는 일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나만의 세계에서 그려지던 글들이 뭉뚱그려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간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한 줄 완벽히 익혀낸 것이 없는 것 같고 풋내기 감성과 설익은 눈빛들이 거친 삭정이처럼 두드러지지 않을까 걱정도 큽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내디뎌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서 우려와 걱정도 덮어두려고 합니다.
<詩>라는 장르도 인간 정신작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저의 문학은 10대에서 현재까지로 이어지는 서투른 결과물들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중간중간 단절의 시간들이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10대에서 20대의 작품들은 거의 남아있질 않아 안타깝기도 합니다만 의식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지 않았을까 자문자답해 봅니다.
어떤 날은 풀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에서, 또 어느 날은 흔들리는 나무에서, 빗방울이었다가 나무였다가 풀잎이었다가 하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가진 말들은 밖에서 들어온 것들이기보다는 안에서 밖을 향하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안에서 도무지 튀어나오지 않는 말들도 있겠습니다만, 부단히 되짚고 익혀 밖으로 나서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내 의식의 단편들을 솔직히 내보내려는 노력도 쉬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같은 말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듯, 나만의 시각과 시작(詩作) 노력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순탄치만 않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어지러운 날, 무수한 빗방울들과 수풀들이 속절없이 흔들려야 하는 날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언제나 든든한 보호막 같은 언어의 집들이 소박하게나마 지어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짧은 인사를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본문 중에서 **물푸레나무
목수가 되고 싶었던 나무가 있었다 햇살 붙잡는 돋을양지*도 아닌 곳에 자리를 잡고 한때는 망치질 소리로 골짜기 내내 흔들었을 늘그막의 목수가 키웠던 푸릇한 나무 한 그루
성글고 뾰족한 잎으로 가지를 내고 차가운 계곡물 소리로 담금질하다 스스로 매몰찬 도끼날이 되어 떨어지던 날까지 그 푸르렀던 눈 섶을 기억해 내기까지 자라지 못하는 나무
아하 나는 물푸레나무였구나 서늘한 별빛을 이고 푸른 눈물을 쏟아야 하는 당신의 물푸레나무
스스로 회초리 치며 단단해지는 나는 나무였으므로 여전히 물푸레나무일 것이므로 그 가슴에 흘렀을 푸른 물소리를 듣습니다
*돋을볕이 비치는 양지(陽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