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들어가며: 화가가 되었다
오늘도 삼성동으로 출근했다. 서울 한복판 정원도 아름다운 하우스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하고 있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갤러리 흰 벽면에는 나의 그림 41점이 가득 걸려있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정원의 모습과 어우러진 그림 속 다양한 새들이 홀로 또는 함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 ‘날지 않아도 돼’처럼 날개가 있어도 당당하게 날지 않고 버티며, 듣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관람객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어떤 이는 나를 ‘새 화가’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오리 화가’로도 부른다. 산책길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새들을 사진에 담아 보내주며 언젠가 꼭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렇다. 나는 화가가 되었다.
2021년 3월, 갑자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번아웃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온갖 방법의 끝에 ‘그림’이 있었다. 책상 위를 어지르고 싶지 않아 아이패드로 그리기 시작했고, 잘 그릴 자신이 없어 손바닥만 한 수첩에 작고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그림에 글을 붙여 그림일기를 썼다. 다양한 소재를 그려보았지만 결국엔 새 그림으로 수렴했고, 하루를 돌아보며 쓰던 일기는 듣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변신했다. 왜 하필 ‘그림일기’였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 나도 알 수 없어서 스스로 묻고 답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하루를 견뎌냈는지, 그리고 나를 버티게 한 내 삶의 이유를 그림과 글을 통해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와 소통하는 도구로서 붓과 펜을 든 것이다. 그 붓과 펜이 그려낸 글과 그림들은 저마다의 표현으로 타인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이 보편적이지만 특별한 개개의 삶에 의미를 환기하는 창문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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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장거리 출장길, 차에 올라 오늘의 노래를 고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god의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올랐다. 왕복 출장길을 달리며 <미운 오리 새끼>를 들었다. 백조가 되어 훨훨 날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과 다른 현실에 답답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백조가 되지 못해 슬픈 미운 오리 새끼였다. 그날 밤부터 백조를 그렸다. 두 날개 활짝 편 모습, 날갯짓으로 기지개 켜며 날아오를 준비하는 모습, 물 위에서 고요하게 숨을 고르며 에너지를 축적하는 모습을 그렸다. 백조를 그리다 새끼 오리도 그렸고, 날개가 있지만 날지 않는 작은 새를 계속 그렸다. 새를 계속 그려 보니, 다 자란 성조보다 작고 여리고 사랑스러운 새끼 백조, 새끼 오리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는 동안 즐겁고, 더 그리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미운 내 모습, 어리숙한 내 모습을 발견했지만, 오히려 그 무구함과 가능성을 엿보았다. 지금 당장은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고 지원과 환경이 부족해서 내가 바라던 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은 진정한 내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닌 것이다. 나는 외부의 요구나 조건과 관계없이 내 의지로도 작고 여리고 사랑스러운 것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이었다.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원하고, 주류인 사람들이 살피지 못한 것들을 챙겼다.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마음과 손을 보태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미운 오리 새끼는 밉지 않다. 오리가 아닌데 오리와 비슷해야 한다고 비교하고 몰아가니 밉게 보인다. 독립된 개체가 되어 홀로 설 힘이 생겼다면 어른과 타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보호와 안전을 핑계로 비슷하게 살라고 종용하는 어른과 타인들 말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스스로 백조임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날지 못한다. ‘날 수 있다’는 자각이 비상의 원동력이고, 지상에서 용기 있게 발을 떼는 그 한 걸음이 비상의 첫 날갯짓이다. 불필요한 비교로 주눅 들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나만의 백조’다. 훨훨 날아 원하는 목적지 어디든 갈 수 있다. 날개가 있다고 모두 날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훨훨 날아 먼 곳을 다니며 살아도 된다. 종종걸음으로 진한 일상의 반경을 유지하며 사는 것도 좋다. 뒤뚱뒤뚱 요란한 발걸음으로 오지랖의 먼지를 일으키는 삶도 따뜻하다.
날개가 있다고 꼭 날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않아도 괜찮다.
양 날개는 몸통으로 이어져 있다. 몸통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진다. 새들이 온몸으로 날갯짓하듯이 삶은 함부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다. 삶도 ‘나는 일’과 ‘날지 않는 일’로만 구분될 수 없다. 날개로 그늘을 만들고 둥지를 만들 수 있다. 날개로 작고 여린 생명들을 품을 수 있다. 깃털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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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4년생 남매를 키우는 워킹맘 24년차 변리사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30개월 변리사 시험공부를 했다. 23년 동안 쉬지 않고 변리사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남매를 낳아 키웠다. 그러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번아웃으로 완전히 망가졌고, 매일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 나는 다시 일어섰다. 덕분에 오늘 특허사무소가 아닌 갤러리로 출근했다. 서울 한복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하고 있다. 갤러리의 하얀 벽면에 내 의지로 마음껏 그린 그림 41점과 모빌 16점을 가득 전시했다. 1년 전만 해도 완전히 망가져 재기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화가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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