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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뱀
김대갑
소설
국판변형/288쪽
2025년 7월 10일
979-11-6855-358-3(03810)
16,000원

■ 작가의 말


언제나,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때마다, 나는 늘 미안했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에게.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단 말인가?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미안함을 안고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을 그려냈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그 도도한 인연의 강 속에서 그들이 질박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존재들이기에. 나의 현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들이 살아갈 어떤 우주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나 자신을 위무했다. 한 편의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추념하는 작은 제의를 올리곤 했다. 그 언젠가 나의 작품 속에서 다시 만나기를 원망(願望)하면서.
『푸른 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첫 구상, 그러니까 그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던 얼개들이 활자화되기까지 근 십오 년 이상이 걸렸다. 대학에서 정통문학을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등단은 늦깎이로 했으니 십오 년의 세월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어찌 되었든 나의 첫 장편소설인 『푸른 뱀』은 등단하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 하나의 부채처럼 맴돌고 있던 소재였다.


이 년 전 오월이었던가. 그때 나는 선비의 고장인 담양에 있었다. 그곳의 창작공간인 ‘글을 낳는 집’에 한 달간 레지던시 작가로 살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십오 년의 세월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썼던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고 플롯을 다시 짜고, 인물 설정도 바꾸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푸른 뱀』의 제목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소설을 쓰는 틈틈이 첼로 연주를 자주 들었다. 인간의 심장을 가장 편안하게 만든다는 첼로 연주를 들으며 퇴고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었다. 기분이 울적할 때는 양금 연주를 들으며 기지개를 켰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때는 대금 소리를 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비탈리의 샤콘느 혹은 오펜바흐가 작곡한 재클린의 눈물을 듣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청순가련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일지도. 이 모두가 소설 속에서 공감각을 지향하는 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가끔 담양의 아름다운 정자들을 입주 문인들과 찾아다니며 힐링의 시간을 가진 것도 무척 행운이었다.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그리고 소쇄원을 비롯한 수많은 정자. 가히 정자의 고장이라고 할 정도로 담양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정자들이 무척 많았다. 그 고적한 분위기에 젖은 채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푸른 뱀』을 상재한 후, 나의 부채 의식이 정자를 감싸고 돌던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인 「프러시안 블루」에서도 청사포 이야기는 등장한다. 주인공인 ‘수’와 ‘환’은 여주와 우섭으로 존재 회전을 거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수’와 ‘환’은 장편소설을 구상하는 와중에 먼저 세상 밖으로 나온 인물들이었다. 여주와 우섭에게 현대적인 감각의 외피를 달게 해서 먼저 탄생시킨 인물들이니까.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푸른 뱀』은 「프러시안 블루」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수십 년 전이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가족과 함께 청사포와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 당시의 청사포는 지금처럼 관광지가 아닌, 무척 한가하고 여유로운 동해안의 마지막 어촌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프러시안 블루로 물든 청사포를 보며 온갖 상상과 환상의 틈바구니를 오고 갔다.
나는 우선 포구의 이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청사포에 오기 전부터, 청사포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이름이 주는 생경함과 푸르름, 어딘가 모를 신비로운 풍경을 떠올렸다.
푸를 청(靑), 뱀 사(蛇), 그리고 포구 포(浦). 푸른 뱀의 포구. 이름 자체에서 어딘가 문향(文香)이 가득 배어 있는, 그래서 시적인 향훈이 물씬 풍기는 청사포. 망부송 맞은 편에는 청사포 유래비가 서 있었다. 그 비석 뒷면에 적힌 짧은 전설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상상의 순간들. 망부송에서 구덕포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만난 손공장군비는 또 어떠하던가?
검은 비석에 한자로 희미하게 쓰인 손공장군비(孫公長軍碑)라는 글자는 또 다른 우주를 떠올리는 신물(神物)이었다. 청사포에 마을이 들어선 후, 처음 당도한 유체를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뱀이라는 글자가 좋지 않다고 해 후일 마을 어른들이 모래 사로 바꾸었다는 청사포. 푸른 뱀의 포구도 좋고 푸른 모래의 포구도 좋았다. 그 어떤 이름이든 모두 풍요한 이미지를 나에게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우리 민족에게 뱀은 서양과 달리 그리 흉측한 것이 아니었다. 뱀의 머리는 남근을 닮아서 예로부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성 신앙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바다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어촌 사람들은 늘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어촌에는 유독 무녀와 제의가 많았고 그를 통해 어부들은 신과 접촉하고자 했다. 그 모두가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희망이었다. 청사포의 푸른 뱀 전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청사포의 동해안 별신굿 연행이 시작되는 곳은, 전설의 주인공인 김 씨 여인을 기리는 망부송과 그 앞의 당집인 것도 역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해운대 끝자락인 미포와 그 옆의 청사포, 그리고 송정의 시작이자 청사포의 끝자락이기도 한 구덕포. 이 세 포구를 일러 해운 삼포라고 한다. 예로부터 해운 삼포에는 삼 년에 한 번씩 <동해안 별신굿>이 열리곤 했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 당제라고도 불리는 이 굿은 그 규모도 장려하거니와 남부 동해안 마을의 문화를 집대성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푸른 뱀』의 시작은 청사포에 내려온 전설이었으나 그 전설과 함께 몸을 섞은 것은 동해안 별신굿이었다. 큰무당인 미향과 그의 애제자인 여주, 그리고 그 여주의 남자 우섭의 이야기가 『푸른 뱀』의 큰 줄기이다. 또한 청사포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악의 상징, 강수를 더해서 내 나름대로 청사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섭이라는 인물을 통해 내 소설은 멀리 인도양의 지상낙원, 세이셸이라는 환상의 섬까지 가닿았다. 거기서 니샤라는 인도계 출신의 무녀를 통해 여주와 우섭이 푸른 뱀이라는 신묘한 존재와 결합하는 모습을, 일종의 매지컬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어색하지 않게 통했는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싶다. 나의 소설 창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앞으로도 무한히 변모할 것이다.

소설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푸른 뱀』은 청사포에 살았고, 지금도 청사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수많은 인연의 얽히고설킴을 통해 청사포라는 우주를 만드는 사람들의 삶을 나는 빈약한 글재주로 표현해 보았다.
어쨌든 홀가분하다. 부산이라는 지역 문단에서 소설가라는 이름을 하나 얻었지만 정작 장편소설을 내지 못한 미안함을 이번에 떨치게 되었으니. 아직도 소설가라는 명칭은 나에게 과분하고 낯설다. 그냥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편할 뿐이다. 앞으로도 정말 좋은 소설로 독자들을 만나는 ‘소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푸른 구름이 머무는 곳, 청운재(靑雲岾)에서
김대갑



■ 본문 중에서

*1

방 안에 전단향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강하면서도 그윽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드럽고 섬세하게 변해가는 향훈이다. 제단 위에서 물안개처럼 흘러나오는 그 향은 상쾌하면서도 어딘가 중후한 느낌도 들었다. 가슴에 오련하게 전해져 오는 향을 맡으며 니샤는 진지한 태도로 경배를 올렸다. 깊은 밤이었다.
그녀의 집안 곳곳에는 온통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흘러 다녔다. 출입구 맞은편에 설치된 제단에는 향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조각품이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는 크리슈나 신의 형상물이, 왼쪽에는 가네샤 신의 형상물이 고요히 자리 잡았다. 또한 제단 위 벽에는 두 신을 그린 커다란 유화가 웅혼한 자태를 자랑했다.
코끼리 머리에 네 개의 팔을 가진 가네샤 신. 온갖 장애를 없애주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또한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슬기를 주는 신이다. 검푸른 피부를 가진 크리슈나는 왼손에 인도식 피리인 반수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우주의 중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인간계와 천상계를 아우르는, 운명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니샤의 조상은 인도에서 마에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세이셸 사람 중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유럽 백인과의 혼혈종인 크레올족이 제일 많았다. 그 외 인도와 일본,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살았다. 세이셸공화국은 마에와 프랄린, 큐리어스를 비롯한 115개의 섬을 품에 안고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였다.
비대한 몸집의 크레올 여인과는 달리 날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사흘 내내 슴바양의 제단에 향불을 피우며 숭고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긴 생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수정 같은 눈동자에 연한 갈색의 피부를 가진 니샤는 전형적인 인도 미녀였다.
그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제단 앞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사흘 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몰려왔고 그것에 따라 제의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니샤는 그윽한 전단향에 취해 눈을 감았는데 어떤 기의 흐름이 바투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자, 점성술사였던 할머니가 그녀 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 화려한 분홍빛의 살와르 카메즈에 푸른색 사리를 걸친 할머니는 오른손을 뻗어 제단 오른쪽의 장식장을 가리키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니샤는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상태에서 제단 옆에 있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차례


1장   니샤와 카오•6
2장   스피카•58
3장   별신굿•110
4장   청사포•140
5장   남지 2호•190
6장   그녀, 여주•248


7장  에필로그•278


작가의 말•282

김대갑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2015년에 한국소설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2021년에는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키르티무카」가 당선되었다.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부산에 대한 산문집 2권을 출간했다.
김해 가야를 소재로 한 팩션집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를 내기도 했다.
2018년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를, 2025년에 장편소설 『푸른 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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