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序
찰나의 순간, 허공을 가르며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오늘 문득 멈춰서서 되돌아보니 지나온 세월이 굽이치는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물길 위로 삶의 영욕이 명멸하듯 스쳐 지나갑니다. 때로는 삭풍 부는 비탈길에서 알몸으로 버티는 나목裸木처럼 시린 계절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진 겨울에도 가지 끝에 서리꽃을 피워내고, 다시 돋아날 새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수 한 수 시조를 빚어 왔습니다.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인두로 그은 상처처럼 남은 기억이며, 할머니의 새 모시 깨끼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입으신 젊은 날의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추억, 그리고 인연의 뒤안길에 남은 애모를 별똥별의 궤적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찰나의 순간 허공을 가르고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우리의 삶 또한 짧고 강렬한 섬광이기에 그 찬란한 기쁨과 이별의 눈물이 영롱하게 어룽지는 이 환한 봄날에 여러 가지 부족한 졸작을 묶어 부끄러운 마음으로 세상의 문 앞에 내어놓습니다.
2026년 새봄에 정해원
■ 시작노트 중에서
시집에 실린 여든다섯 편의 시조는 내 생의 마디마다 새겨진 나이테와 같습니다. 그중 유독 마음이 머무는 열여섯 편을 골라 ‘시작 노트’라는 짧은 고백을 덧붙이는 것은 시라는 정제된 언어 뒤에 숨은 시인의 정직한 발자국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창작의 비화秘話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로 세상을 견디며 길어 올린 사유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일입니다. 선정된 시들은 전반적으로 세상을 향한 ‘인고忍苦의 시선’에서 시작하여 내면의 ‘자유로운 사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 본문 중에서
*봄을 맞으며
봄바람 한 자락이 일어서서 오는 시간 삼동에 찌든 삶을 뒤집어서 씻어낸다. 겨울이 구시렁거리며 돌아갔던 어느 길목.
문밖에 봄이 와서 헛기침하며 서성인다. 계절은 눈치 보며 현관문을 두드리다 다시금 돌아나가서 배회하는 한나절.
빈 의자 내어놓고 그 사람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지난 시간 조각을 맞추다가 차 한 잔 끓여놓고는 새봄 맞아 앉는다.
*꽃비 쏟아지는 아침
꽃비가 소나기로 쏟아지는 아침나절 우산 하나 받쳐 들고 그대 맞아 나갔는데 굽이진 세월 저편에 그리움이 펄럭인다.
꽃잎을 한 줌 주워 허공중에 날려본다.
나비되 날아가다 지연紙鳶처럼 떠올라서
아득한 전설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봄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