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말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관념론 철학자인 플라톤은 우리의 감각 경험이 실재에 이르는 진정한 안내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거부했던 플라톤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 즉 고귀하고 영적인 세계에서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의 어렴풋한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은 완전한 형태가 존재하는 영역에서 왔고 이제 정신과 영혼을 통해 그 영역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할 거라 생각해서 플라톤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완전한 세계(실상, 실재)’에 대해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 설명은 이렇다: 쇠사슬에 묶인 채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뒤쪽을 볼 수 없고, 오직 동굴 안쪽만을 볼 수 있다. 사람들 뒤쪽에는 길이 있고 위에 커다란 불이 있어서 불빛이 동굴 안을 비추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 수레가 길을 따라 지나가면 불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동굴 벽에 비춰진다.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은 그림자만 보일 테니 그 그림자에 이름을 붙이고 그게 무엇인지 토론하고 추론할 것이다.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묶여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어떨까? 그는 처음에는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차차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림자가 아닌 색깔과 3차원을 지니는 물체들에 어리둥절하고 놀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저 동굴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은?.” 그렇다, 동굴에 있는 한, 우리는 진실(실재)을 볼 수 없다. 불교는 바로 실재를 보라고 한다. 5감각식으로 인식하는 것들은 명색(名色), 즉 이름과 모양에 의해 속기 쉬워 실재를 볼 수 없으니, 명색을 떠나 본래면목, 즉 실재를 보라고 한다. 실재를 보기 위하여 불교는 우선 사물이 어떻게 인식되는 가에 대해 설명한다. 의식의 생성과정을 설명하고, 그 과정을 통하여 실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이다. 유식론은 5감각기관(안이비설신: 五根)이 각각의 대상인 5감각대상(색성향미촉: 五境)을 접하여 5감각식을 일으키듯이, 제6근(의근)이 제6경(법경)을 접하여 제6식(의식)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의근이 법경을 접하여 제6식(의식)을 일으킬 때, 마음작용(마음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해 온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이다. 의식(제6식)의 주체로서 ‘의근’을 정의하고, 의근의 접촉대상으로 ‘법경’을 정의한 것은 불교가 유일하다. 이에 대한 정의가 유식론의 제1의 특징이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25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의식의 주체와 객체를 각각 ‘의근’과 ‘법경’과 같은 개념으로 정의한 학문 분야는 지금까지 없다. (이 책에서는 의근을 ‘마음기관(Mind Organ)’이라 설명하였고, 법경을 ‘마음정보(Mind Information)’라 설명하였다.) 유식론은 6근을 통하여 인식된 모든 식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고 설명하고, 그 아뢰야식을 제8식이라 정의한다. 모든 식에 관한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의근에 의해 읽혀진다.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정보가 바로 마음정보, 즉 법경이다. 법경은 6식을 비롯하여, 6식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느낌, 그리고 학습과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모든 지식을 망라한다. 아뢰야식은 사실상 식이 아니고, 모든 식의 정보가 저장되는 영역으로,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6식과 같이 별도의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아뢰야식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포괄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식에 관한 모든 정보가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그 아뢰야식을 제8식으로 정의한 것이 유식론의 제2의 특징이다. 유식론은 제7식으로 말나식(생각식 또는 사유식)을 정의한다. 제6식이 의근으로 법경(마음정보)을 접하여 일어나는 식이라 하면, 말나식은 제6식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의근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마음정보를 끊임없이 접촉하여 인지한다. 사유 과정은 마음정보 A를 접하여 A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A로부터 B를, B로부터 C를, C로부터 D를 생각해 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제7식은 제6식이 계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제6식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별도의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제7식은 제6식과 동일하게 작동하지만, 제6식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사유 과정에서 아상(我相)이라는 번뇌가 개입된다는 점이다, 사유 과정에서 아상이라는 번뇌가 개입되어 최초의 정보가 오염된다고 한다. 아상이라는 번뇌는 아견, 아치, 아애, 아만이라 하는데, 편견, 선입견, 분별망상 등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보지 못하고 편견, 선입견, 분별망상 등에 의해 오염된 정보를 보기 때문에 실재를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는 금강경에서 제1성으로 아상을 버리라고 한다. 아상이 있는 한 실재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제7식으로 말나식을 상정하고, 말나식의 사유 과정에서 아상이라는 번뇌가 개입되어 최초의 정보가 오염된다는 설명은 유식론의 제3의 특징이다. 불교는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본다면 실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제7식에서의 번뇌가 개입되지 않는 사유 과정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실재를 볼 수 있다면,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마음과 영혼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꿈속이나 사후 세계의 의식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부디 마음의 실체를 찾아 실재(실상)를 볼 수 있도록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길 빈다.
2025년 5월 최덕규 합장
■ 본문 중에서 *제1장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마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마음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마음에 대한 사전적(辭典的) 의미를 살펴보면,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생각, 인지, 기억, 감정, 의지, 그리고 상상력의 복합체로 드러나는 지능과 의식의 단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뇌의 모든 인지 과정을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마음이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특성으로 의식, 인식, 사고, 판단, 기억 등을 할 수 있는 일련의 인지능력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다 보면, 생각, 인지, 기억, 감정, 의지, 의식, 인식, 판단 등과 같은 것들도 또한 정확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은 정의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음을 규명하는 것은 우주의 생성원리를 밝히거나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을 찾아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대한 정의나 설명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마음(mind, 心 또는 意)’ 그 자체가 매우 포괄적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고 한다. 그리고 ‘너의 마음을 보라’고도 한다. 전자의 마음은 주체가 되고, 후자의 마음은 객체가 된다. 이처럼 마음은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한다. ‘마음’이 주체와 객체로 혼용되어 사용되는 것만 보아도 ‘마음’은 분명 명확하게 정의된 용어가 아닌 것 같다. 또한, 마음은 비물질적 개념이기 때문에 정의하거나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 어떤 형상을 갖는 물체이거나 맛이나 향을 갖는 물질이라면 마음은 이미 과학의 영역에서 명확하게 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적 존재와는 관계가 없는 비물질적 영역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과학의 영역에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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